1987년 7월 9일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군중이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를 가득 메웠다.
1987년 7월 9일 고 이한열 열사를 추모하는 군중이 서울시청 앞 광장 일대를 가득 메웠다.
사진: 서울특별시 · 서울역사아카이브 · 고 이한열 추모 군중.jpg · 공공누리 제1유형

2024년 9월 1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 9·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연단에 선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통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자"고 말했다. 그는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며 헌법 3조 영토 조항도 지우거나 고치자고 했다.[1][2]

임 전 실장은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을 지냈다.[3] 19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35년 뒤 통일을 내려놓자고 말한 것이다. 평양이 민족을 버리고 세대가 통일에서 멀어지는 동안, 민족 좌파의 뿌리를 가진 세대도 교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세대는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여의도까지, 두 갈래 길

1980년대 민족 좌파의 무대는 대학이었다. 졸업한 운동권이 제도 정치로 들어간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한 갈래는 민주당 계열이다. 2004년 17대 국회에는 전대협 출신 10명이 들어갔다.[4] 이 길은 운동권 출신 개인이 기성 정당에 들어간 것이었다.

다른 갈래는 진보정당이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에 따르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은 2001년 9월 무렵 충북의 한 수련원에서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3년 안에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을 건설하여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연방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취지의 특별결의문, 이른바 '군자산의 약속'이 채택됐다. 결정문은 이 결의 이후 전국연합 소속 단체의 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고 적었다.[5] 같은 결정문의 반대의견은 이 결의를 "제도권 정치에 대한 참여 내지 대중정당 건설ㆍ참여를 선언한 것"으로 봤다.[5] NEXT는 결의문 원문을 찾지 못했고, 결정문도 그 내용을 요약해 적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정당 득표 13%로 10석을 얻었다.[5] 이후 당 안에서 NL 계열이 다수가 되며 노선 갈등이 커졌고, 2008년 민중민주(PD) 계열이 '종북' 문제를 들어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었다.[6] 2011년 통합진보당이 출범했고, 헌법재판소는 2014년 그 '주도세력'을 근거로 당을 해산했다.

◇통일을 내려놓은 쪽에 진보가 있었다

임 전 실장의 발언은 개인의 주장에 그치지 않았다. 통일부는 올해 5월 펴낸 『2026 통일백서』에 처음으로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관계'라는 표현을 넣었다.[7] 이에 앞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025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남북이 법률적으로 승인된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두 국가라고 말했다.[8] 이재명 대통령은 7월 1일 "북의 체제를 존중하겠다, 흡수 통일을 추진하지 않겠다, 일체의 적대 행위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9] 다만 대통령은 8월 5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자는 정 장관의 제안을 두고 "논쟁의 여지는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됐다.[10]

이 변화를 읽는 시각은 세 갈래다. 첫째는 단절론이다. 1민족 1국가 연방제와 민족공조를 뼈대로 한 1980~90년대 민족 좌파의 교리와 결별했다는 해석이다. 둘째는 호응론이다. 문화일보는 사설에서 백서가 김정은 위원장의 수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비판했고, 정교진 고려대 북한통일연구센터 객원연구위원은 북한 두 국가론의 무비판적 수용이라고 지적했다.[11][12] 셋째는 실용론이다. 정 장관은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 이후 남북이 사실상 두 국가였다며,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국가연합 단계를 두 국가 단계로 설명했다.[8][13] 다만 그는 이 구상이 정부안으로 확정될 것이라는 말은 뒤에 정정했다.[14]

세 해석은 한 가지 사실에서 만난다. 민족 통일을 최상위에 둔 교리는 진보 진영 안에서도 더는 정책의 기준이 아니다. 남은 것은 대북 화해와 평화공존이라는 진보 쪽의 오랜 정책 전통이다.

◇이념은 떠나고 사람은 남았다

교리는 물러났지만 사람은 남았다. 국민일보의 2024년 팩트체크에 따르면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의원 167명 가운데 65명(38.9%)이 1980년대 전후 학생운동 이력을 갖고 있었다.[15] 20대 국회 민주당 당선자 가운데 운동권 출신은 46.3%였다는 집계도 있다.[16] 22대 총선에서는 운동권 출신 출마자 96명 가운데 59명이 당선됐다. 여기에는 국민의힘 소속 2명도 포함된다.[17]

다만 이 숫자를 민족 좌파의 힘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운동권 출신, 86세대, 민족해방(NL) 계열은 서로 다른 말이다. 2000년 총선에서 당선된 '386 후보' 13명에는 한나라당의 오세훈·원희룡도 있었다.[18] 운동권 출신 의원 수를 NL과 민중민주(PD) 계열로 나눠 센 집계는 없다. 김선철 에모리대 교수는 이를 두고 "(민주화)운동이 주류가 된 것이 아니라 운동권 출신들이 주류가 된 것"이라고 했다.[19]

86세대 안도 한 덩어리가 아니다. 한국갤럽의 2025년 11월 조사에서 스스로 진보라는 응답이 가장 많은 연령대는 40대(35%)였다. 50대는 진보 33%, 보수 23%였지만 60대는 보수(31%)가 진보(26%)보다 많았다.[20] 86세대 본류인 1960년대생이 50대 후반과 60대 초반에 걸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세대 안에서도 성향이 갈리고 있다. 어느 층이 진보 성향을 유지하는지는 연구마다 다르다. 통계청 『한국의 사회동향 2016』에 실린 김석호의 분석에서는 1965~69년생의 보수 성향 정당 지지율이 2002년 대선 28.8%에서 2012년 대선 42.6%로 올랐고, 1970년대 초반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21] 한상익 등은 2017년 조사를 분석해 1966~70년생 하위 세대의 진보 성향이 두드러진다고 봤다.[22] 조성대·최상명은 세대 효과가 전대협 출신 같은 학생운동가 집단에서만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봤다.[23]

그래서 86세대를 둘러싼 논쟁은 이념에서 세대로 옮겨 갔다.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불평등의 세대』와 관련 논문에서 386세대가 국가와 시민사회, 시장의 위계 상층을 오래 차지해 왔다고 분석했다.[24] 그는 인터뷰에서 "386들이 다 쥐려 하지 말고 밑의 세대에게 기회를 주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25] 비판의 초점이 '무엇을 믿느냐'에서 '얼마나 오래 쥐고 있느냐'로 바뀐 것이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는 올해 9월 펴낸 『문학과 혁명』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86세대를 키워 준 것은 결국 한국의 보수 정치였다고 말했다.[26] 보수 정치의 실패가 이 세대에 거듭 힘을 실어 줬다는 해석이다.

◇척결의 정치는 먼저 끝났다

민족 좌파를 '주사파'나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해 정치적으로 끝내려는 시도도 있었다. 결과는 반대였다.

2023년 12월 26일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취임 연설에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운동권 특권세력과 개딸 전체주의 세력과 결탁해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나라 망치는 것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27] '운동권 청산'은 2024년 총선의 구호가 됐다.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위성정당은 175석, 국민의힘과 위성정당은 108석을 얻었다. 운동권 출신 출마자의 61.5%가 당선됐다.[17]

윤석열 당시 대통령은 202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이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고 말했다.[28] 2024년 12월 3일 밤에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했다.[29]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그를 파면했다.[30] 서울중앙지법은 올해 2월 19일 1심에서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31][32] 척결을 내건 쪽이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되고 1심에서 내란 우두머리로 유죄 판단을 받은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1994년 김일성 조문 파동과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계기로 한국적 매카시즘이 20년 넘게 이어졌다고 분석한 바 있다.[33]

◇법원이 확인한 것과 확인하지 않은 것

그렇다고 민족 좌파 안의 친북 조직이 허구였던 것은 아니다. 헌법재판소와 법원은 그 실체를 여러 번 확인했다. 다만 개별 형사 사건에서 법원은 조직의 규모와 체계를 좁게 인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재판관 8대 1 의견으로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며 경기동부연합 등 '주도세력'이 최종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판단했고,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구체적 위험성도 인정했다.[34] 그러나 대법원은 이듬해 1월 이석기 전 의원 사건에서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봐 징역 9년을 확정하면서도, 내란음모는 무죄로 판단했고 지하혁명조직 'RO'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다.[35][36]

2020년대 사건도 비슷하다. 청주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은 2025년 3월 징역 2~5년이 확정됐지만, 법원은 범죄단체라고 할 만한 규모나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봤다.[37] 민주노총 전 간부 간첩 사건은 2025년 9월 전 조직쟁의국장에게 징역 9년 6개월이 확정됐고, 함께 기소된 3명 가운데 1명은 징역 3년, 2명은 무죄가 확정됐다.[38][39] 창원 사건은 기소 3년이 넘도록 1심 선고가 나오지 않았다.[40]

북한과 연계된 조직은 실재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형사 판결에서 법원은 사회를 움직일 만한 대규모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NEXT의 판단: 교리 없는 권력의 다음 질문

NEXT는 민족 좌파의 퇴장이 좌파 전체의 퇴장으로 이어질지는 교리를 내려놓은 뒤 무엇을 새 기준으로 세우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86세대는 민족과 통일이라는 명분 없이도 권력의 중심에 남아 있다. 그 자리의 정당성을 묻는 질문은 이제 '어떤 이념을 믿느냐'가 아니라 이철승 교수가 제기한 세대 간 기회의 문제, 곧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넘겨주느냐로 옮겨 가고 있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이념의 퇴장은 세대의 퇴장으로 이어진다. NEXT가 이 흐름을 '서막'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척결 정치의 결말은 보수 쪽에도 같은 교훈을 준다. '주사파'라는 딱지는 민족 좌파를 끝내지 못했다. 끝을 앞당긴 것은 평양의 선택과 세대의 이탈, 그리고 진보 진영 자신의 노선 수정이었다. 그 결말이 가리키는 방향은 북한과 연계된 조직은 법정에서, 세대 문제는 정책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 판단에도 한계가 있다. 민족 좌파의 뿌리를 가진 정당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보당은 2024년 국회에 3석을 얻었고(2석은 더불어민주연합 비례),[41] 올해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을 4년 전 21명에서 41명으로 늘렸다.[42] 현 정부의 '평화적 두 국가'가 민족 교리와의 단절인지 북한 노선에 대한 호응인지를 둘러싼 논쟁도 끝나지 않았다.

출처

[1] MBC, 임종석 전 비서실장 9·19 기념식 발언 보도, 2024.9.19. ↩

[2] 서울신문, 임종석 "통일, 하지 맙시다", 2024.9.20. ↩

[3] 서울신문, 임종석 비서실장 프로필, 2017.5.10. ↩

[4] 문화일보, <4.15 총선이후>전대협 출신 10명 '입성', 2004.4.16. ↩

[5] 헌법재판소, 2013헌다1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국가법령정보센터), 2014.12.19. ↩

[6] 한국일보, 패권 다툼·종북 시비 14년 NL계 진보정당 역사, 2014.12.20. ↩

[7] 서울신문, 2026 통일백서 '평화적 두 국가', 2026.5.19. ↩

[8] 한국일보, 정동영 장관 '평화적 두 국가', 2025.10.14. ↩

[9] 서울신문, 이 대통령 "흡수통일 추진하지 않겠다", 2026.7.1. ↩

[10] 뉴스핌, 이 대통령 "논쟁의 여지", 2026.8.6. ↩

[11] 문화일보, 사설, 2026.5. ↩

[12] 데일리NK, 정교진, 북한의 '두 국가론' 무비판적 수용, 2026.4.13. ↩

[13] 뉴스핌, 정동영 장관 국정감사 '두 국가' 발언, 2025.10.14. ↩

[14] 뉴스핌, 정동영 장관 발언 정정, 2025.10.28. ↩

[15] [국민일보, [팩트체크] 민주당 의원 39% '운동권'](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9041268), 2024. ↩

[16] 문화일보, 운동권黨 탈피하겠다더니…, 2016.4.15. ↩

[17] 이데일리, 한동훈 '운동권 청산' 사실상 실패…운동권 61.5% 당선, 2024.4.11. ↩

[18] 한국일보, 4.13민의/386후보 13명이 '금배지', 2000.4.15. ↩

[19] 경향신문, 386세대의 주류 등극으로 한국 민주화는 완성됐을까, 2018.1.7. ↩

[20]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643호, 2025.11. ↩

[21] 경향신문, 김석호, 정치 태도와 행위의 세대 간 차이(통계청 한국의 사회동향 2016) 보도, 2016.12.12. ↩

[22] 한상익·최종호·김정훈, 86세대, 균열인가? 허상인가?, 평화연구 27(1), 2019. ↩

[23] 조성대·최상명, 86세대와 세대단위로서의 학생운동가 집단,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33, 2017. ↩

[24] 이철승, 세대, 계급, 위계: 386 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 한국사회학 53(1). 같은 저자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 ↩

[25] 경향신문, 이철승 인터뷰, 2019.9.21. ↩

[26] 경향신문, "86세대 키워준 건 결국 보수 정치"… 천정환 인터뷰, 2026.9.29. ↩

[27] MBC 뉴스데스크, 한동훈 비대위원장 취임, 2023.12.26. ↩

[28] 서울신문, 윤석열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 2023.8.15. ↩

[29] 경향신문,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담화, 2024.12.3. ↩

[30] RFA, 헌법재판소 윤석열 대통령 파면, 2025.4.4. ↩

[31] MBC, 윤석열 1심 무기징역, 2026.2.19. ↩

[32] MBC, 윤석열 내란 사건 항소심, 2026. ↩

[33] 박태균, 탈냉전 이후 한국적 매카시즘의 탄생, 역사와현실 93, 2014. ↩

[34] 한국일보, 헌법재판소 통진당 해산 결정문 요약본, 2014.12.19. ↩

[35] 대법원, 판례속보 2014도10978, 2015.1.22. ↩

[36] 서울신문, 이석기 공판결과, 징역 9년 확정, 2015.1.22. ↩

[37] 서울신문, '간첩 활동' 충북동지회 유죄 확정, 2025.3.13. ↩

[38] 한국경제, 간첩 혐의 전 민주노총 간부, 징역 9년6개월 확정, 2025.9.25. ↩

[39] 경향신문, 무죄 받았지만…, 2025.10.19. ↩

[40] 한국경제, 기소 3년 넘은 창원 간첩단 재판, 1년 만에 재개, 2026.9.8. ↩

[41] 참여와혁신, 22대 총선 진보당 3석, 2024.4. ↩

[42] 쿠키뉴스, 진보당 지방의원 41명 배출, 2026.6.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