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399scout · ImjingakPrayer.jpg · CC BY-SA 4.0
지난 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남북관계의 현실을 인정했다. "남북 대화는 7년 넘게 멈춰 서 있고 북한은 핵 능력을 나날이 고도화하고 있다"고 했다.
닷새 전 북한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은 "한국과 엮이거나 상종할 수 있는 사소한 공간이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대화 복원과 긴장 완화를 제안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지난달 21일에는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이 매설한 지뢰가 폭발했다.
북한은 대화를 거부하고 핵무기를 늘리며 남한을 적국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여전히 대화와 평화공존을 말한다.
한국 진보 진영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대북정책의 전제가 흔들리고 있다.
북한이 무너뜨린 세 가지 전제
한국 진보 진영의 대북정책은 크게 세 가지 생각에 기초했다.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이며 통일해야 한다. 대화와 경제협력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은 '우리 민족끼리' 통일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협력으로 신뢰를 쌓기로 했다. 2018년 판문점선언도 '민족 자주의 원칙'을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전제들을 차례로 부정했다.
김정은은 2023년 12월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했다. 올해 3월 개정한 헌법에서는 평화통일과 민족대단결을 삭제했다. 남한의 대화 제의는 거부했다.
민족 자주라는 명분도 무색해졌다. 북한은 2024년 러시아와 상호 군사원조 조항을 담은 조약을 체결했고, 이듬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한 사실을 인정했다.
북한이 민족과 통일을 버리고 체제 생존과 핵무력 강화에 집중하면서 한국 진보 진영도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이제 무엇을 근거로 대북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두 국가론'을 둘러싼 진보 진영의 분열
논쟁은 2024년 9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발언에서 본격화했다.
임 전 실장은 9·19 평양공동선언 기념식에서 "통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응이 엇갈렸다. 김민석 당시 최고위원은 "설익은 발상"이라고 비판했고, 이연희 의원은 공감을 표시했다. 당시 민주당 의원이던 정동영 장관은 "헌법 위반"이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정 장관의 입장이 1년 만에 달라졌다.
2025년 9월 그는 '사실상의 평화적 두 국가론'으로 전환하는 것이 대북정책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통일부는 그해 12월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 관계'로 바꾸겠다고 했다.
정 장관은 올해 5월 남북이 각각 주권 국가이지만 외국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통일이다.
김정은이 주장하는 두 국가는 통일을 거부하는 두 국가다. 반면 통일부가 주장하는 두 국가는 통일을 지향하는 두 국가다.
같은 표현을 쓰지만 목표는 정반대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이 모순을 지적한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평화적 두 국가'인데 '통일'은 지향하자?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북한의 두 국가 선언을 "반민족적 처사"라고 비판했다. 다만 기존 평화·통일 담론의 전면적인 재검토도 주문했다.
통일을 포기할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 진보 진영은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다.
대통령과 통일부도 말이 다르다
혼선은 정부 내부에서도 나타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남북관계를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반면 통일부는 '평화적 두 국가 관계'를 공식 정책으로 제시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정부가 두 국가를 인정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 대통령은 올해 8월 두 국가론에 대해 "논쟁의 여지는 있는 일"이라고 했다.
정부의 공식 입장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더욱이 통일부가 두 국가론을 추진하면서 법제처나 법무부와 협의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지난 11일 세계일보가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실이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보도한 내용이다.
헌법적 검토조차 충분히 거치지 않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한다.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도록 명시한다.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인정할 경우 이 조항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남북 합의의 법적 성격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단순히 남북관계를 무엇이라고 부를지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층도 통일보다 평화공존
여론도 변하고 있다.
통일연구원이 지난달 30일 공개한 조사에서 통일이 필요하다고 답한 진보 성향 응답자는 47.1%였다. 지난해보다 5.2%포인트 하락했다. 보수층의 53.3%보다도 낮았다.
반면 평화공존을 바라는 응답은 진보층 66.5%, 보수층 64.7%였다.
진보층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절반에 못 미쳤지만, 평화공존을 원하는 사람은 세 명 가운데 두 명이었다.
통일보다 평화공존을 우선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물론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전쟁을 막고 긴장을 줄이는 일은 어느 정부든 해야 한다.
그러나 평화공존을 위해 북한의 두 국가론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지, 통일이라는 헌법적 목표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핵을 가진 북한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북한의 핵무기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 6일 "협상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철저한 힘의 행사로" 주권을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도 되돌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동영 장관은 지난 7일 국정감사에서 "핵 없는 한반도는 우리의 국정 목표"라고 밝혔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고, 한국 정부는 비핵화를 목표로 내세운다. 북한은 남북대화를 거부하는데 정부는 대화 복원을 추진한다.
그렇다면 정부는 무엇을 통해 북한의 태도를 바꿀 것인가. 핵을 가진 채 남한을 적대하는 북한과 어떻게 평화적으로 공존할 것인가.
대화와 평화공존이라는 목표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먼저 정리할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 남북관계의 공식 규정이다. 대통령의 '특수관계'와 통일부의 '평화적 두 국가 관계'가 어떻게 양립하는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둘째, 헌법과 법률의 문제다. 두 국가론이 헌법의 영토·평화통일 조항과 충돌하지 않는지 법제처와 법무부의 검토를 거쳐 공개해야 한다.
김정은은 이미 통일을 버리고 남한을 적국으로 규정했다. 한국 진보 진영은 그 변화 앞에서 여전히 통일과 두 국가론 사이를 오가고 있다.
북한이 통일을 포기했다고 대한민국까지 통일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통일이라는 명분만 붙든 채 북한의 변화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남북대화가 7년 넘게 끊긴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대화 재개 구호가 아니라 달라진 북한을 상대할 분명한 원칙과 전략이다.
출처 26건 펼치기
정부·국회·국제기구·법령 3건
-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6·15 남북공동선언 원문, 2000.6.15.
- 정책브리핑, 판문점선언 원문, 2018.4.27.
- 정책브리핑, 통일부 2026년 업무보고, 2025.12.19.
언론 보도와 그 밖의 자료 23건
- 아주경제, 정동영 통일부 장관 국정감사 발언, 2026.10.7.
- 경북매일,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 10월 2일 담화, 2026.10.2.
- MBC, 합참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 최종 조사 결과 발표, 2026.10.5.
- NEXT, 통일탑을 헐고 헌법을 고쳤다, 북한의 '두 국가'는 이렇게 왔다.
- 뉴시스, 북한의 쿠르스크 파병 공식 인정, 2025.4.28.
- 뉴시스, 임종석 발언과 민주당 안팎의 반응, 2024.9.22.
- 자유아시아방송, 두 국가론을 둘러싼 야권 반응, 2024.9.23.
- 서울신문, 정동영 장관 '평화적 두 국가론' 발언, 2025.9.18.
- MBC, 정동영 장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설명, 2026.5.20.
- 프레시안, 정욱식 칼럼, 2026.5.20.
- 프레시안, 문재인 전 대통령 발언, 2024.9.20.
- 경향신문, 2025년 광복절 경축사, 2025.8.15.
- 경향신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발언, 2025.9.24.
- 뉴스핌, 이재명 대통령 통일부 업무보고 발언, 2026.8.6.
- 세계일보, '평화적 두 국가' 법률 자문 여부, 2026.10.11.
- 중앙일보(다음 전재), 국민의힘의 두 국가론 비판, 2025.10.14.
- 경향신문,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발언, 2025.12.26.
- 데일리안, 통일연구원 2026 통일의식조사, 2026.9.30.
- 데일리안, 2025년 통일부 국정감사, 2025.10.15.
- 경향신문, 임종석 전 실장 발언, 2025.10.15.
- 주간경향, 북한 외무성 10월 6일 성명, 2026.10.6.
- 아시아경제(네이트 전재), 김여정 담화 보도, 2026.9.17.
- 쿠키뉴스, 2026년 통일부 국정감사, 2026.10.7.